집착저장소 811

파리 6일

파리 일정을 서두른 이유는 신혼여행을 온 K를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어제저녁 힘든 일정으로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간단하게 저녁만 먹고 헤어졌다. 나도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K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식사와 대화를 하면서 줄곧 D를 관찰했는데 그에 반면 D는 침착했다. D의 마음의 깊이는 얼마만큼 파인 것일까. 친구를 더 괜찮은 곳에서 대접하고 싶었는데 서비스나 음식이 가격에 비해 좋지 않았다. 모든게 속상했다. 아침부터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전에 어떤 책에서 유럽 사람들은 귀족처럼 혹은 조선의 양반들처럼 겉으로 보이기를 좋아해서 운동을 잘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는데 시대가 많이 변했다보다. 아니면 세계화의 영향으로 미국인의 생활 방식이 파리에 침투한 것인가? 마르스 광..

도망친/프랑스 2020.11.17

세비야 7일

창백한 아침 공기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는 여전히 이질적이었다. 이곳에 오래 지낸다면 익숙해지겠지. 내가 오렌지를 떠올릴 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노랗게 빛을 발산하는, 마치 썬키스트나 카프리썬의 광고 같은 그림이었다. 생각해보니 제주도도 귤이나 오렌지는 늦가을에서 겨울에 수확했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파랗게 칠한 페인트를 배경으로 열린 오렌지 나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디어는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요새는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우습게 사시사철 귤이나 오렌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과일을 즐길 수 있으니 어느 배경을 뒤로하건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여느 날과 비슷하게 골목을 걷고 사람들의 시간을 훔쳤다. 사진 찍는 걸 아는..

도망친/스페인 2020.11.16

spandauer damm 103 + 589

몇 개월간 사진을 찍지 않다가 오랜만에 사진기를 들었다. 뭔가를 찍고 싶은 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사진을 찍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진을 찍는지 궁금해서 서점에 들러 요새 나오는 출판물을 보다가 나왔다. 별다른 걸 찾지는 못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을 걸었다. 그러다 교회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나무들이 보였다. 이미 겨울이 찾아온 베를린의 나무들은 가지만 앙상했다. 깨진 거울 같기도 하고 폭발하는 혈관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고 폭죽처럼 터졌다. 콘크리트 벽의 드러난 철사 구조물은 코브라 같기도 했고 벽 틈새에서 자라는 가지는 새의 다리 같기도 했다. 모두들 나를 잡아먹으려고 각을 재는 것 같았다. 지하철의 계단들은 거대한 강판 같아서 내 몸이 치즈처럼 사방팔방으로 갈려 나가는 기..

살아온/독일 2020.11.12 (2)

파리 5일

오늘의 황당 사건: D의 폰을 소매치기 맞았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주머니에서 쓰윽하고 가져갔다. 내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바로 쫓아냈는데 이미 털리고 난 뒤였다. 집에 두고 온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다가 확인해봤는데 없었다... 매우 화가 나고 짜증 날 상황이지만 D는 침착해 보였다. 실제로 침착했다. 아마 더 큰 일들이 D를 괴롭혔기 때문에 폰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새 폰을 살까 알아봤지만 생각보다 비싸다며 그냥 폰 없이 다니기로 했다. 백업을 해두지 않은 사진들을 잃어버려서 D는 굉장히 슬퍼했다. D의 시간을 앗아간 건 그들이 아니라 나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분무기처럼 뿌리는 비를 맞으며 파리를 걸었다.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쉬지 않고 셔터를 계속 눌렀..

도망친/프랑스 2020.11.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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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계획은 1년이었는데 6개월 만에 인스타그램을 다시 깔았다. 아직 나를 기억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근황과 안부를 궁금해했다. 뭐하냐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 다들 의아해하거나 조금 당황하는 거 같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지금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뭐가 많이 결핍된 사람처럼 보이나 보다. 모두에게 내 어려움을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구구절절 설명하기가 귀찮았다. 내가 우울하고 힘든건 외부 환경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문제여서 말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좋은 모습들을 보여주다가 또 몇 개월간 잠수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아예 사라진다고 해도 그러려니 하는 때가 오지 않을..

꿈, 조각, 결 2020.11.11 (2)

파리 4일

떠나는 아침에도 안개가 자욱했다. 차갑고 수분기 많은 공기가 날카롭고 매서웠다. 도로는 눈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결정들로 얼어있어서 미끄러웠다. 플릭스버스는 연착으로 늦게 왔다. 파리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버스 운전사는 자욱한 안개를 헤쳐 끝없는 도로를 질주했다. 파리는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파리 플릭스 버스 하차지점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꽤 걸려서 우버를 이용했다. 몇 유로 아끼려고 리옹역까지 걸어간 다음에. 언어에 가둘 수 없는 상황들임에도 짜증내지 않고 함께 필요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S가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퇴근 시간과 겹쳐서인지 길이 꽤 막혔다. 센 강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파리가, 가로등에 얼핏 비치는 S의 얼굴이 예뻤다. 이 상황이 ..

도망친/프랑스 2020.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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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고민을 거듭하고 의미 없는 기록을 다시 하기로 했다. 순간에 떠오르는 대로, 뭘 지켜야 한다는 강박 없이 자유롭고 편하게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보기로 했다. 노트에 적을까 하다가 나중에 엄마나 아빠가 볼 수 있을까 그러면 나를 조금 더 이해하지 않을까 생각해서 몇 개월을 방치했던 블로그를 좀 고쳤다. 블로그 이름도 바꾸고 닉네임도 바꿨다. 지금 나에게 어울리는건 추락 하강 소멸 죽음 침전 뭐 이런 류의 단어들이다. 마지막까지 익카루스를 고민했지만(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이카루스를 동경한다) 그냥 이름으로 닉네임을 바꿨다.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다는 말은 이제까지 솔직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럴 수도 있다. 덜 솔직했다는 그 벌로 나는 얼굴..

꿈, 조각, 결 2020.11.08 (2)

파리사진

〈봉쾨르 호텔〉로 가는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 제르베즈는 다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 길은 담장을 따라 하수용 도랑이 흐르는 어둡고 좁은 골목길이었다. 그녀가 재회한 이 악취는 거기서 랑티에와 함께 보낸 2주일, 가난과 말다툼의 2주일을 생각나게 했는데, 이제는 그 추억조차 가슴 아픈 그리움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이 세상에 홀로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목로주점

꿈, 조각, 결 2020.07.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