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저장소 811

미니잡 27주차

- 오늘은 새로운 지점에서 일을 했다. 야채도 많이 준비되어 있었고 손님이 적어서 다른 지점들보다 수월했다. J는 마음을 쉽게 열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서글서글하고 인상이 좋았다. 음악을 전공했다. 작곡한 곡이 몇 개 있는데 보컬을 구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내가 신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관심을 보였다. 성경을 읽을 때 궁금한 점이 많다고 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 매우 바빴다. 장사가 왜 이렇게 잘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주문이 너무 밀려서 살짝 짜증이 날 뻔 했지만 굳이 빨리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내 속도대로 했다. 지난 일요일에는 저녁 시간만 매출이 2000유로가 넘었다고 했다. 적은 인원에 고효율을 바라는 걸 고용주 입장에서 나쁘다 할 수는 없고 나는 내 일인분만 하면 된다. L과 ..

살아온/독일 2020.12.05 (3)

Spandauer Damm 103 + 610

퇴근하고 걸어오는 길에 공원묘지가 있어서 잠시 쉬었다. 4시까지 밖에 문을 안열여서 아쉬웠다. 가만히 누워서 이미 어두워진, 암청색의 베를린의 하늘을 보다가 시체놀이도 하고 나무랑 대화도 하고 놀았다. 묘지에 누워보는 건 처음이었다. 고요함과 적막함 평안함과 익숙함이 잘 전해졌다. 땅의 한기와 시린 바람이 어둠으로 덩어리져 내 몸을 감쌌다. 롱패딩을 입은 채 여러 감정들에 돌돌 말린 기분이었다. 결박됐지만 답답하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옴을 느낄 수 있었다. 땅 속인지 물 속인지 하늘 위인지 알 수 없는 깊은 어디쯤에서 묵직한 침묵만 잔잔히 흔들렸다. 파도를 보듯이 구름을 보듯이 먼 저편의 고요함을 갈망하고 있었다. 눈을 뜨면 나무들이 여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서로 싸우는 벌레들도 있었고 섹스를 하는 사..

살아온/독일 2020.12.03

Spandauer Damm 103 + 608

본능에 충실한 삶, 나는 짐승 같은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먹고 자고 섹스하는 게 전부였는데 어제 인스타 라이브를 반나절 동안이나 했다. 화면 속이지만 사람과 대화를 정말 오랜만에 긴장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문명을 만난 느낌이랄까. 이제 조금씩 밖으로 나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는 계획에 없던 섹스를 했다. 정신을 잃을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기절하듯이 쓰러져 잤다. 며칠 몸이 많이 안 좋았는데 모든걸 개운하게 털어낸 느낌이다. 오늘 밥은 밖에서 먹었다. 커피를 내려서 텀블러에 싸서 빵 집에서 크루아상을 하나 샀다. 근처에는 빵 집이 두개 있는데 슈타인에케 체인점 빵 집과 손수 만드신다는 빵 집이 있다. 고민하다가 슐로스 배커라이로 갔다. 레베나 리들, 에데카 보다는 맛이 있었지만 다..

살아온/독일 2020.11.30

비소비

3월부터 미니멀하게 살기 시작하면서 나에게 꼭 필요한 것들을 메모장에 적어봤다. - 식료품 (안먹고살수는없나...) - 약 혹은 영양제 (아플 경우에) - 커피 (이거는 못지우겠다) - 치약칫솔 (안하고싶다) - 샴푸 (머리감을때마다끔찍한데 노푸는...더끔찍) - 책 (전자책포함) - 교통티켓 (일하러가려면) - 술 (금주할수있을까...) + 필름 (사진찍을일이있으려나모르겠지만 만일의경우에) 이 정도인데 요새 술은 거의 안 마시고 있으니까 천천히 줄여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한다. 이 외의 것들은 이미 가지고 있거나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라 생각하기에 소비를 하지 않기로 결심해본다. 혹 가지고 있는 것들이 고장나거나 없어져도 새로 구매하지 않는다. 핸드폰이 없어도 지장 없을 만큼 관계가 느려졌고, 노트북이..

꿈, 조각, 결 2020.11.27 (2)

미니잡 26주차

- 얘기로만 듣던 두 사람을 만났다. B는 왜소한 체격이었다. 소문대로 느렸고 다른 사람들은 답답해하거나 화날 만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추웠는지 문을 계속 닫거나 몸을 움츠렸다. H는 잠깐 봤는데도 좋은 기운을 전달해줬다. 나는 사장이 아니어서 그들의 일하는 방식이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거의 아무 말 없이 일만 했다. - 유리에 구인 종이가 붙어있었다. 왜 장사가 잘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필요한지 얼마 전에 나에게도 지금보다 조금 더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지금 받는 돈으로는 너무 적고 생활비도 부족하지 않냐며. 타일짜이트로 일을 하게 되면 달에 받는 돈이 700유로 정도고 보험비랑 세금도 내준다. 대신 주에 20시간을 해야 한다. 지금은 주에 10시간 정도 일하는데 이것도 버겁다. 매..

살아온/독일 2020.11.24

Spandauer Damm + 595

헤이즐의 수업이 캔슬돼서 퇴근 후 어딘가를 가기로 했다. 황량하게 탁 트인 곳을 이곳저곳 떠올리다가 반제를 가기로 했다. 후보군에는 올림공원이랑 토이펠스베억이었다. 물이 그리웠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사진기를 챙겨달라고 했다. 에스반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동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온도도 쌀쌀했는데 이미 해까지 져버려서 오래 있다 오지는 못하겠다 생각했다. 가면서 역시 제발트 글을 읽었다. 섬세한 표현들과 단어 하나하나가 온몸을 감싸고 간지럽히다가 찌르다가 때리기도 하고 긁기도 했다. 베를린을 떠올리는 장면을 읽었는데 마침 딱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 이미지들이 글을 따라 모였다가 흩어졌다 만들었다 부쉈다를 반복했다. 해변의 모래는 밟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물을 봐서 너무 좋았다. 탁 트인 ..

살아온/독일 2020.11.1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