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저장소 811

Würzburg

프라하 같기도 하이델베르크 같기도 파리 같기도. 처음 왔지만 익숙한 도시였다. 특히 코헴이 많이 생각났다. 도시는 썰렁했다. 인적이 거의 없었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연휴여서인지 알 수 없었다. 뜨문뜨문 해가 떴지만 추위가 가시지는 않았다. 거리를 헤매다가 문을 연 빵집이 있어서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교회 앞 광장에는 비둘기와 바람만 공허하게 날렸다. 여름에 왔다면 와인도 마시고 예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겠지만 겨울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도시를 조금 더 탐구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도 파악할 수 없는 생각들과 함께 그냥 이리저리 걷고 걸었다. 오랜만에 걸어서 다리가 아팠다. 오랜만에 사진도 몇 장 찍었다. 하루는 즐..

도망친/독일 2020.12.27

종이

시간이 흐를수록 끝없는 꿈으로 빠지고 감각은 왜곡된다. 현실과 구별할 수 있는 뭔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잃는다. 나를 잃는 건 두렵지 않았다. 너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현실과 우주는 무한히 크기도 작기도 하다. 모든 게 멀면서 모든 게 가까이 있다.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고 객관적인 시공간이 소멸된다. 차원의 세계에서는 생각하는 모든 게 보인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에 던져진 느낌이다. 눈을 떠도 감아도 끝없는 코드 혹은 홀로그램의 연속이다. 빛과 색에 민감해지고 눈을 감아도 환하다. 모든 소리에 색이 있고 음악은 이미지로 보인다. 무수히 많은 눈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나도 나를 보고 있다. 도망치고 싶었는데 방법이 없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반복된다고 느껴..

꿈, 조각, 결 2020.12.26

Spandauer D.103 + 631

일요일에 프랑크푸르트 친구네 집에 놀러왔다. 수다떨고 게임도 하고 먹는게 전부였지만 생일 축하도 하고 평소에 하지 않던 선물도 줬다. 명절 느낌이 많이 났다. 오늘은 비를 맞으며 마인 강변을 걸었다. 옷이 홀딱 젖었다. 기록해두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모두 순식간에 휘발한다. 이제는 별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도 사라진다. 사진은 더더욱 못 찍게 된다. 젖었던 옷이 마르듯 내 몸의 피들도 천천히 말라가고 있다. 곧. 아 오늘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살아온/독일 2020.12.23 (4)

Spandauer D. 103 + 619

가게에서 만드는 음식들에 질려서 몸이 너무 무거운 느낌이 들어서 며칠간 단식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떡볶이를 먹었고 치킨마요를 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는데도 음식을 입으로 욱여넣는 나는 뭘까 생각했다. 공중그늘의 비옷을 출퇴근하며 들었다. 보컬의 음색이 차갑고 쓸쓸한 이 도시랑 잘 어울렸다. 보통 자주 듣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 그때의 분위기나 감정, 온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슬펐다.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모든 잘못은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다. 더 이상 충격적일 일도 놀라울 일도 새로울 일도 없다. 이미지는 말이 없고 글자는 까맣기만 하고 음악은 울림이 없다. 내게 남은 언어는 뭘까. 숨을 깊게..

살아온/독일 2020.12.11

Spandauer Damm 103 + 616

비가 멈추고 해가 다시 떴다. 노을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주황빛 하늘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치과는 처음이라 꽤 긴장하고 떨렸는데 하늘을 보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진료카드를 작성하는데 모두 독일어로 있어서 당황했다. 알 수 없는 병, 약의 이름들이 써있었다. 대충 아니오로 다 답했다. 진료도 독일어로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국어를 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4시 15분 예약이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5시 정도에 진료를 받았다. 선생님은 왜 이제야 왔어요 다 치료하려면 오래 걸리겠어요 하시며 짧은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그냥 단명하려고 그런다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 젊은데 그러다 진짜 그렇게 된다며 마취를 했다. 신경치료는 꽤 걸리기 때문에 다음 주에 예약을 잡아주고 치료를..

살아온/독일 2020.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