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161

spandauer damm 103 + 589

몇 개월간 사진을 찍지 않다가 오랜만에 사진기를 들었다. 뭔가를 찍고 싶은 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사진을 찍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진을 찍는지 궁금해서 서점에 들러 요새 나오는 출판물을 보다가 나왔다. 별다른 걸 찾지는 못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을 걸었다. 그러다 교회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나무들이 보였다. 이미 겨울이 찾아온 베를린의 나무들은 가지만 앙상했다. 깨진 거울 같기도 하고 폭발하는 혈관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고 폭죽처럼 터졌다. 콘크리트 벽의 드러난 철사 구조물은 코브라 같기도 했고 벽 틈새에서 자라는 가지는 새의 다리 같기도 했다. 모두들 나를 잡아먹으려고 각을 재는 것 같았다. 지하철의 계단들은 거대한 강판 같아서 내 몸이 치즈처럼 사방팔방으로 갈려 나가는 기..

살아온/독일 2020.11.12 (2)

berlin + 468

하루하루가 너무 무섭고 공포다. 손이 계속 떨리고 집에 있으면 큰 일이 날 것만 같아서 노트북과 카메라를 챙겨서 밖에 무작정 나왔다. 몸살이 날 때 처럼 시리고 기운이 없었지만 걷고 또 걸었다. 오랜만에 니콘을 들고 나왔는데 뭘 어떻게 찍어야할지 전혀 감이 안왔다. 걷다가 전혀 처음 가보는 동네가 나왔다. 평소라면 척척 찾아가겠지만 그럴 힘이 없었다. 큰 도로 중간에 혼자 덩그러니 서서 지나가는 사람과 차를 하늘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쓰러질 것 같아서 어디든 발 닿는대로 걸었다. 평소라면 사먹지 않을 꽤 비싼 가격이었지만 라떼마끼아또를 시키고 지난 사진들을 보면서 한참을 앉아있었다. 주문을 하고 나서 근처에 젤라또 가게가 있다는 게 떠올랐다. 어차피 앉아 있을거였는데 거기 가서 먹을걸 후회했다. 3..

살아온/독일 2020.07.14 (1)

berlin+467

-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감이 안잡힘 - 이번 주는 매일 술과 함께 보냄 - 베를린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을 하고 집으로 초대해서 시간을 보냈는데 좋으면서도 우울이 더 깊어지는 느낌 -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도록 앞으로 조금 더 자주 사라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 - 흑백으로만 사진을 찍다가 색으로 다시 찍고 있는데 지금까지 어떻게 사진을 찍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안남 - 내 색은 모두 사라져버려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라는 생각 - 처음은 반절 그 다음 하나 또 하나 그리고 반절 3일을 내리 먹음 - 동공이 커지고 빛에 민감해짐 정신이 맑아지고 또렷해지는 기분 - 조명,밝기에 민감해지고 더 어두워지면 좋겠다고 생각 - 소리, 특히 음악에 감정이 민감해짐 - 술을 함께 마시면 구토를 함 세명 모두 -..

살아온/독일 2020.07.13

gubenerstr.17 + 462

- 가끔씩 블로그에 들어와 썼던 글들을 공개했다. 하루종일 잘한걸까? 생각이 들었다. 아직 세상에 나가기가 이른 것 같다. -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먹었다. 식욕이 사라졌다. 대신 술 생각만 가득이다. - 망가진 부분들을 다시 하나씩 회복하고 싶다가도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 가을처럼 날이 많이 추워졌다. - 지금 내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다. 정신도 육체도 비자도. 내 아이덴티티는 뭐지?

살아온/독일 2020.07.08 (2)

미니잡 4주차

이번 주는 4호점으로 출근했다. 처음이라 허둥지둥했지만 매니저가 잘 가르쳐줘서 금방 적응했다. 혼나기도 했지만 기분 상하지 않게 잘 배웠다. 설거지할 때 뜨거운 물 밖에 사용할 수가 없어서 꽤나 고역이었다. 가는 길은 정말 싫었는데 오는 길은 엄청 즐거웠다. 하늘도 달도 환상이었다. 아 오늘 팁을 많이 받았다. 3.9유로! 오늘은 다른 매니저와 일했다. 처음으로 남자와 일했는데 정말 대화는 1도 없이 묵묵히 일만 했다. 스피드가 엄청 빨랐다. 다행인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서 나도 실수하지 않고 제대로 해낸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5호점처럼 손님이 많지는 않아서 여유있게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같이 마감을 하고 잠시 담배를 피면서 짧은 대화를 나눴다. 팁은 모두 나에게 줬다. 엄청 쿨했다. 4호점은 사람..

살아온/독일 2020.07.06

박제하우스, 마무리

- 역시 사진으로 뭔가를 하는 일, 특히나 돈 버는 일은 재미가 없다. 그래도 무언가에 단단히 미쳐서 어느 시점을 보내게 해줬다는 점에서 사진에게 감사한다. - 한달여동안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수집했다. 그것들이 어떻게 쓰일지는 잘 모르겠지만. - 카메라는 정리하기로 진즉에 마음먹었는데 한국을 갈 수가 없어서 아직까지 못했다. 어서 돌아가고 싶다. - 좋은 실험, 시도였고 꿈이었고 즐겼다.

살아온/독일 2020.07.03

[gubenerstr.17] + 456

여러 꿈에 섞여, 오늘도 깨어났음에, 독일을 떠날지 남을지를 계속 고민하며 몽롱하게 일어났다. 뉴스를 보다가 정치를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몸을 섞었다. 책을 읽으며 들으면 좋을 라디오를 찾다가 집중이 도저히 어려워 포기했다. 아감벤의 글을 읽었다. 샤워를 부리나케하고 알바를 달려갔다. 지각은 안했지만 여유있게 오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다. 무지하게 바빴고 팁을 1.5유로 받았다. 비를 맞았다. 비를 맞는 사람들을 봤다. 나도 그들도 낭만적으로 보였다. 7월의 첫날은 비가 내렸다가 맑아졌다가,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공기가 몸에 닿는 느낌이 하루 종일 스코틀랜드를 떠올리게 했다. 끝없이 우울하고 싶은 날이다.

살아온/독일 2020.07.01

미니잡 3주차

- 시간 너무 빠르다. 확실히 일을 하니까 시간의 중심이 이쪽으로 확 쏠린다. 이번 주는 일과 스튜디오를 병행했더니 더 빨리간 느낌이다. 화금토일을 일했다. 오픈, 마감을 두번씩 했다. 주말은 두시간반씩만 일했고 오픈이라 거의 양배추만 썰었다. 마감일은 조금 고되기도 했지만, 어느 날은 12시 넘어서 퇴근했다, 즐거웠다. 사회의 부속품이 된 느낌이랄까. 여전히 왜 해야하나의 고민은 있지만 당분간은 쭉 할 것 같다. 이제 어느정도 일이 익숙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온/독일 2020.06.25 (2)

[박제하우스] 1주차

드디어 홈스튜디오를 오픈했다. 전부터 정말 하고 싶었다. 불을 지핀 것은 영화 클로저였지만 마음에만 담아두다가 살 날이 얼마 안남았으니까 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홍보도 할 겸 6월 한달은 무료로 촬영을 하기로 했다. 트위터에 올렸는데 반응이 없었다. 몇 명에게 소문을 타서 촬영을 조금 했다. 아직까지 개인적으로 연락오는 사람은 없는 걸 보면 그냥 이벤트성으로 끝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시도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정말 즐거웠다. 이번 주는 총 6팀을 촬영했다. 3팀이 더 예약되어있었는데 각자의 사정으로 취소했다. 프로필, 포트레이트, 우정사진, 부부사진을 찍으면서 내가 사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돈을 안받는 이벤트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사진 찍는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느꼈다..

살아온/독일 2020.06.20

[gubenerstr.17] + 438

- 내가 슬프게한 모든게 슬프다 - 다시 세상으로 나가려는 발걸음을 떼보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 숨이 턱턱 막힌다 - 내가 나에게 여러 사람에게 준 쓰리고 깊은 상처가 끝없이 괴롭힌다 - 좋은 사람과 괴물을 선택해야하는 양자택일의 고민에서 나는 언제나 제3의 길을 택한다 - 차가움과 냉혹함을 견딜 수가 없다 - 서울이 그립다 보고싶다 괴롭다 슬프다 - 사랑이 없는 하루를 견딜 수가 없다

살아온/독일 2020.06.13

미니잡 2주차

- 이번 주는 이틀만 일했다. 프로베가 끝나고 첫 주여서 사실상 이주차라기보다 첫 주였다. 오픈, 마감을 각각했는데 오픈은 거의 그 날 사용할 음식이나 야채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세 명이서 일을 했고 처음 오픈이면서 근무라 좀 떨렸지만 잘 해냈다. 게다가 팁도 받았다. 생각보다 많이 바쁘고 정신없지만 조금씩 배워가는 일이 즐거웠다. - 마감을 하는 날은 여섯시부터 열한시 조금 넘어서까지 근무했는데 내가 생각보다 일을 잘 못해서 조금 오래 걸렸다. 원래는 세 명이서 마감을 해야하는데 매니저가 내가 잘 한다고 생각해서 한 명을 시프트에서 뺐다. 처음 해보는 포지션에 러쉬까지 밀려와서 내가 꽤 당황했다. 살짝 얼타서 매니저가 내가 좀 익숙한 포지션으로 바꿨다. 내가 기죽어보였나? 나한테 기죽지 말라고 했다...

살아온/독일 2020.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