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독일 161

Spandauer D.103 + 645

- 작은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발콘에서 바라봤다. 지난 인사들은 울음을 많이 참았는데 이번 작별은 오히려 덤덤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안 들기도 했지만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추억이 완성된 느낌이었다. 액자 속의 우리는 오래 빛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얘기했던 대로 한국이나 미국에서 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끝이 계속 유예되고 있다. 2주간의 소란스러운 선물이 끝났다. 살을 부대끼며 북적북적이던 작은 방도 이제는 넓어졌다. 빈자리가 크게 느껴졌다. 대신 다시 적막과 고요를 되찾았다. 이불 커버를 돌려놓고 낮잠을 자다가 유투브도 보다가 책을 읽었다. 오롯이 혼자였다. 내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친구들과의 시간이 말로 할 수 없이 좋지만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이라고 결론을 냈다. 나는 스..

살아온/독일 2021.01.06

Spandauer D.103 + 640

- 아직 2020년도 적응하지 못했는데 2021년이 됐다. 어쩌면 태어나서 하루도 삶에 적응하지 못한건 아닐까. 아무래도 좋다. 이제는 내 달력이 어디까지 넘겨질지 궁금하지 않다. 언제부턴가 나의 거취가 제일 궁금하다. 여전히 목적지를 결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어디로 흘러갈까. 최근에 비자카드를 잃어버렸다. 재발급을 받을 생각은 없다. 이리저리 방황하다 떠돌다 어딘가에서 흩어지면 좋겠다. - 친구들과 바다에서 새해를 맞고 차박을 했다.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카운트다운을 경험했다. 소소하게 터지는 폭죽을 보며 앞으로 다시는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구름이 많아 일출은 볼 수 없었다. 바다 사진을 몇 장 찍어왔다. - 텅 빈 도시 텅 빈 바다 텅 빈 하늘 보이는 모든 것이 비어있다. 종 갈매기 파도의..

살아온/독일 2021.01.01 (2)

Spandauer D.103 + 631

일요일에 프랑크푸르트 친구네 집에 놀러왔다. 수다떨고 게임도 하고 먹는게 전부였지만 생일 축하도 하고 평소에 하지 않던 선물도 줬다. 명절 느낌이 많이 났다. 오늘은 비를 맞으며 마인 강변을 걸었다. 옷이 홀딱 젖었다. 기록해두고 싶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모두 순식간에 휘발한다. 이제는 별로 남겨야 한다는 의무감도 사라진다. 사진은 더더욱 못 찍게 된다. 젖었던 옷이 마르듯 내 몸의 피들도 천천히 말라가고 있다. 곧. 아 오늘 맛있는 커피를 마셨다.

살아온/독일 2020.12.23 (4)

Spandauer D. 103 + 619

가게에서 만드는 음식들에 질려서 몸이 너무 무거운 느낌이 들어서 며칠간 단식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떡볶이를 먹었고 치킨마요를 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는데도 음식을 입으로 욱여넣는 나는 뭘까 생각했다. 공중그늘의 비옷을 출퇴근하며 들었다. 보컬의 음색이 차갑고 쓸쓸한 이 도시랑 잘 어울렸다. 보통 자주 듣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 그때의 분위기나 감정, 온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슬펐다.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모든 잘못은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다. 더 이상 충격적일 일도 놀라울 일도 새로울 일도 없다. 이미지는 말이 없고 글자는 까맣기만 하고 음악은 울림이 없다. 내게 남은 언어는 뭘까. 숨을 깊게..

살아온/독일 2020.12.11

Spandauer Damm 103 + 616

비가 멈추고 해가 다시 떴다. 노을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주황빛 하늘을 보고 예쁘다고 생각했다. 독일에서 치과는 처음이라 꽤 긴장하고 떨렸는데 하늘을 보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진료카드를 작성하는데 모두 독일어로 있어서 당황했다. 알 수 없는 병, 약의 이름들이 써있었다. 대충 아니오로 다 답했다. 진료도 독일어로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한국어를 하시는 선생님이 계셨다. 4시 15분 예약이었는데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5시 정도에 진료를 받았다. 선생님은 왜 이제야 왔어요 다 치료하려면 오래 걸리겠어요 하시며 짧은 대화를 이어갔고 나는 그냥 단명하려고 그런다며 멋쩍게 웃었다. 아직 젊은데 그러다 진짜 그렇게 된다며 마취를 했다. 신경치료는 꽤 걸리기 때문에 다음 주에 예약을 잡아주고 치료를..

살아온/독일 2020.12.08

미니잡 27주차

- 오늘은 새로운 지점에서 일을 했다. 야채도 많이 준비되어 있었고 손님이 적어서 다른 지점들보다 수월했다. J는 마음을 쉽게 열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서글서글하고 인상이 좋았다. 음악을 전공했다. 작곡한 곡이 몇 개 있는데 보컬을 구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다. 내가 신학을 전공했다고 하니 관심을 보였다. 성경을 읽을 때 궁금한 점이 많다고 했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 매우 바빴다. 장사가 왜 이렇게 잘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주문이 너무 밀려서 살짝 짜증이 날 뻔 했지만 굳이 빨리할 이유도 없어서 그냥 내 속도대로 했다. 지난 일요일에는 저녁 시간만 매출이 2000유로가 넘었다고 했다. 적은 인원에 고효율을 바라는 걸 고용주 입장에서 나쁘다 할 수는 없고 나는 내 일인분만 하면 된다. L과 ..

살아온/독일 2020.12.05 (3)

Spandauer Damm 103 + 610

퇴근하고 걸어오는 길에 공원묘지가 있어서 잠시 쉬었다. 4시까지 밖에 문을 안열여서 아쉬웠다. 가만히 누워서 이미 어두워진, 암청색의 베를린의 하늘을 보다가 시체놀이도 하고 나무랑 대화도 하고 놀았다. 묘지에 누워보는 건 처음이었다. 고요함과 적막함 평안함과 익숙함이 잘 전해졌다. 땅의 한기와 시린 바람이 어둠으로 덩어리져 내 몸을 감쌌다. 롱패딩을 입은 채 여러 감정들에 돌돌 말린 기분이었다. 결박됐지만 답답하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옴을 느낄 수 있었다. 땅 속인지 물 속인지 하늘 위인지 알 수 없는 깊은 어디쯤에서 묵직한 침묵만 잔잔히 흔들렸다. 파도를 보듯이 구름을 보듯이 먼 저편의 고요함을 갈망하고 있었다. 눈을 뜨면 나무들이 여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서로 싸우는 벌레들도 있었고 섹스를 하는 사..

살아온/독일 2020.12.03

Spandauer Damm 103 + 608

본능에 충실한 삶, 나는 짐승 같은 삶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먹고 자고 섹스하는 게 전부였는데 어제 인스타 라이브를 반나절 동안이나 했다. 화면 속이지만 사람과 대화를 정말 오랜만에 긴장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문명을 만난 느낌이랄까. 이제 조금씩 밖으로 나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는 계획에 없던 섹스를 했다. 정신을 잃을 만큼 뜨거웠다. 그리고 기절하듯이 쓰러져 잤다. 며칠 몸이 많이 안 좋았는데 모든걸 개운하게 털어낸 느낌이다. 오늘 밥은 밖에서 먹었다. 커피를 내려서 텀블러에 싸서 빵 집에서 크루아상을 하나 샀다. 근처에는 빵 집이 두개 있는데 슈타인에케 체인점 빵 집과 손수 만드신다는 빵 집이 있다. 고민하다가 슐로스 배커라이로 갔다. 레베나 리들, 에데카 보다는 맛이 있었지만 다..

살아온/독일 2020.11.30

미니잡 26주차

- 얘기로만 듣던 두 사람을 만났다. B는 왜소한 체격이었다. 소문대로 느렸고 다른 사람들은 답답해하거나 화날 만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추웠는지 문을 계속 닫거나 몸을 움츠렸다. H는 잠깐 봤는데도 좋은 기운을 전달해줬다. 나는 사장이 아니어서 그들의 일하는 방식이 나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거의 아무 말 없이 일만 했다. - 유리에 구인 종이가 붙어있었다. 왜 장사가 잘되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이 필요한지 얼마 전에 나에게도 지금보다 조금 더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지금 받는 돈으로는 너무 적고 생활비도 부족하지 않냐며. 타일짜이트로 일을 하게 되면 달에 받는 돈이 700유로 정도고 보험비랑 세금도 내준다. 대신 주에 20시간을 해야 한다. 지금은 주에 10시간 정도 일하는데 이것도 버겁다. 매..

살아온/독일 2020.11.24

Spandauer Damm + 595

헤이즐의 수업이 캔슬돼서 퇴근 후 어딘가를 가기로 했다. 황량하게 탁 트인 곳을 이곳저곳 떠올리다가 반제를 가기로 했다. 후보군에는 올림공원이랑 토이펠스베억이었다. 물이 그리웠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사진기를 챙겨달라고 했다. 에스반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동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온도도 쌀쌀했는데 이미 해까지 져버려서 오래 있다 오지는 못하겠다 생각했다. 가면서 역시 제발트 글을 읽었다. 섬세한 표현들과 단어 하나하나가 온몸을 감싸고 간지럽히다가 찌르다가 때리기도 하고 긁기도 했다. 베를린을 떠올리는 장면을 읽었는데 마침 딱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 이미지들이 글을 따라 모였다가 흩어졌다 만들었다 부쉈다를 반복했다. 해변의 모래는 밟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물을 봐서 너무 좋았다. 탁 트인 ..

살아온/독일 2020.11.1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