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프랑스 18

파리 6일

파리 일정을 서두른 이유는 신혼여행을 온 K를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어제저녁 힘든 일정으로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간단하게 저녁만 먹고 헤어졌다. 나도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K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식사와 대화를 하면서 줄곧 D를 관찰했는데 그에 반면 D는 침착했다. D의 마음의 깊이는 얼마만큼 파인 것일까. 친구를 더 괜찮은 곳에서 대접하고 싶었는데 서비스나 음식이 가격에 비해 좋지 않았다. 모든게 속상했다. 아침부터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전에 어떤 책에서 유럽 사람들은 귀족처럼 혹은 조선의 양반들처럼 겉으로 보이기를 좋아해서 운동을 잘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는데 시대가 많이 변했다보다. 아니면 세계화의 영향으로 미국인의 생활 방식이 파리에 침투한 것인가? 마르스 광..

도망친/프랑스 2020.11.17

파리 5일

오늘의 황당 사건: D의 폰을 소매치기 맞았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주머니에서 쓰윽하고 가져갔다. 내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바로 쫓아냈는데 이미 털리고 난 뒤였다. 집에 두고 온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다가 확인해봤는데 없었다... 매우 화가 나고 짜증 날 상황이지만 D는 침착해 보였다. 실제로 침착했다. 아마 더 큰 일들이 D를 괴롭혔기 때문에 폰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새 폰을 살까 알아봤지만 생각보다 비싸다며 그냥 폰 없이 다니기로 했다. 백업을 해두지 않은 사진들을 잃어버려서 D는 굉장히 슬퍼했다. D의 시간을 앗아간 건 그들이 아니라 나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분무기처럼 뿌리는 비를 맞으며 파리를 걸었다.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쉬지 않고 셔터를 계속 눌렀..

도망친/프랑스 2020.11.11 (3)

파리 4일

떠나는 아침에도 안개가 자욱했다. 차갑고 수분기 많은 공기가 날카롭고 매서웠다. 도로는 눈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결정들로 얼어있어서 미끄러웠다. 플릭스버스는 연착으로 늦게 왔다. 파리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버스 운전사는 자욱한 안개를 헤쳐 끝없는 도로를 질주했다. 파리는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파리 플릭스 버스 하차지점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꽤 걸려서 우버를 이용했다. 몇 유로 아끼려고 리옹역까지 걸어간 다음에. 언어에 가둘 수 없는 상황들임에도 짜증내지 않고 함께 필요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S가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퇴근 시간과 겹쳐서인지 길이 꽤 막혔다. 센 강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파리가, 가로등에 얼핏 비치는 S의 얼굴이 예뻤다. 이 상황이 ..

도망친/프랑스 2020.11.08

스트라스부르

많은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바꾸고 고쳤다를 반복했다. 어떻게 여행을 정리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하기로 했다. 대부분의 시간이 담겨있는 메모리카드를 파리로 가는 버스에서 잃어버려서 남은 사진이 별로 없지만 사진을 다시 하나씩 꺼냈다. 몇 개의 사진들이 이제는 기억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지난 겨울의 스트라스부르를 생생하게 끄집어낸다. 4개월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오늘처럼 생생하다. 차가 조금 밀리는 바람에 도착 예정시간보다 늦었다. 이미 밤이 짙게 내려 앉았다. 장시간 버스를 타서 배가 조금 고팠다. 처음 버스에 내려서 마주한 공기는 지독하게 차가웠다. 도시가 안개에 잠겨있었다. 빛의 번짐을 방해하는 답답한 수증기로 가득했고 여러 감정이 담긴 짐가방을 끌고 숙소로 갔다...

도망친/프랑스 2020.04.15

50mm PARIS(2)

Leica M7, kodak gold200, 08/2019 라디오를 들으며 목적지 없이 산책하듯 걸었다. 파리는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은 길, 함께 앉고 싶은 잔디가 많아서 좋다. 천천히 걸으며 다양한 모습들을 경험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산책이 주는 행복을 느꼈다. 걷다가 함께 앉아서 쉬고 싶은 카페들도 많았다. 유럽에 사는 사람들은 노천 카페에 앉아서 뜨거운 커피에 휴식을 참 좋아한다. 보이는 풍경들을 보며, 사람들을 보면서 각자가 사는 이야기, 묻고 싶은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참 멋지다. 나도 참 많은데 혼자 걸어서 할 수 없었다. 벼룩시장에서 구한 유효기간이 지난 필름이어서 결과물이 잘 나올까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마음에 쏙 든다.

도망친/프랑스 2019.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