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스페인 12

그라나다 8일

말라가와 그라나다를 두고 오래 고민했다. 말라가는 론다도 갈 수 있고 무엇보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고 그라나다는 알함브라의 궁전을 볼 수 있다. 결국은 버스로 세 시간가량을 달려서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버스비는 편도 50유로 정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본 설산이 멋졌다. 후지산을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났다. 숙소에 짐을 놓고 나왔다. 그라나다에서는 술을 시키면 타파스를 무료로 제공해서 타파스 투어도 많이 다닌다고 한다. 낮부터 사람들이 타파스에 스프리츠(띤또)를 먹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가격이 매우 저렴해서 놀랐다. 궁전은 내일 보기로 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사람들 구경도 하고 도시 전망도 봤다. 이슬람 양식이 도시 곳곳에 녹아져 있었다. 아라베스크 장..

도망친/스페인 2021.01.09

세비야 8일

떠나는 날 태양을 보고 싶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안개가 껴서 더 깜깜했다. 연휴인 건지 출근 시간이 늦은 건지 거리가 정말 조용했다. 문 닫은 가게, 보이지 않는 사람, 텅 빈 도시. 그 속에 혼자라고 착각하고 돌아다니는 나. 금새 날이 밝고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잠시 동안은 조용히 산책할 수 있었다. 내 바닥의 끝은 어디일까. 더 아래로, 더 깊이 파고든다. 바닥의 바닥의 바닥의 바닥. 거기서 한번 더 내려가 그 아래 또 바닥.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야 끝이 있을지 도저히 감이 안온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을까. 타인을 갈기갈기 찢을 권리가 내게 있는 건가. 내 행복과 선택이 왜 누군가를 아프게 할까. 죽음으로 모든게 끝날까.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끝..

도망친/스페인 2021.01.08 (1)

세비야 7일

창백한 아침 공기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는 여전히 이질적이었다. 이곳에 오래 지낸다면 익숙해지겠지. 내가 오렌지를 떠올릴 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노랗게 빛을 발산하는, 마치 썬키스트나 카프리썬의 광고 같은 그림이었다. 생각해보니 제주도도 귤이나 오렌지는 늦가을에서 겨울에 수확했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파랗게 칠한 페인트를 배경으로 열린 오렌지 나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디어는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요새는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우습게 사시사철 귤이나 오렌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과일을 즐길 수 있으니 어느 배경을 뒤로하건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여느 날과 비슷하게 골목을 걷고 사람들의 시간을 훔쳤다. 사진 찍는 걸 아는..

도망친/스페인 2020.11.16

세비야 5일

지난 밤 쏟아지는 별을 볼 때 까지만 해도 오늘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출발부터 꼬였다. 언제나 닥쳐서 하는 습관 때문에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가는 기차를 놓쳤다. 급하게 택시를 탔다. 빨리 가달라고 부탁을 몇 번이나 드렸더니 엄청 빨리 가줬다. 기차 출발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기차를 타러 가는 문은 굳게 닫혔고 직원들이 있었지만 열어주지 않았다. 너무 늦었다고 했다. 적어도 5분 전에는 와야한다고 했다. 그렇게 눈 앞에서 기차를 마드리드로 보내고 다시 다른 택시를 타서 버스 터미널로 갔다. 이 기사 아저씨는 약간 덤탱이를 씌운 듯 했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기에 그냥 돈을 주고 호다닥 달려서 버스표를 끊고 버스를 탔다. 여기서 조금 헤맸는데 더 지체했으면 마드리드에서 세비야로 가는 기차를 놓칠 뻔 ..

도망친/스페인 2020.07.16 (7)

톨레도 4일

바로 스페인 남부로 내려갈까 톨레도를 들릴까 하다가 루트가 조금 복잡해도 들리기로 했다. 마드리드를 떠나 버스를 타고 근처 도시인 톨레도에 왔다. 버스를 예약했는데 막상 터미널에 가보니 예약한 시간에 탈 수 없었다. 그러면 다들 예약은 왜 하는지... 주목받는거를 원체 싫어하는데 사람들이 막 쳐다보니까 땀 좀 흘리고 다다음 버스를 탔다. (마드리드에서 톨레도로 여행가는 사람들이 많아 탑승 줄이 매우 길다. 대신 배차가 짧아 금방 탈 수 있는데 예약한 시간에 타지 못한다는거 자체가 조금 스트레스였다.) 도착해서 숙소까지 꽤 걸어가야 했는데 오르막길이라 조금 지쳤다. 그래도 저렴한 가격에 좋은 숙소를 구해서 가서 쉬자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올라갔다. 함께한 M은 정신과 신체가 많이 지쳐보였다. 여정이 피곤하기..

도망친/스페인 2020.07.03

마드리드 3일

유독 추위를 많이 느끼는 나이지만 마드리드도 12월은 쌀쌀했다. 일요일 아침 거리는 휑했다. 그래도 S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침으로 따뜻한 커피에 빵을 사서 미술관으로 갔다. 프라도 무료입장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부터 미술관 관람을 했다. 꽤 길게 줄을 서서 티켓팅을 하고 관람을 했는데 역시나 웅장한 사이즈, 방대한 작품들에 괜히 3대 미술관이 아니구나 싶었다. 세계 3대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만큼 자부심이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고 관람을 했다. 사진촬영이 불가해서 아쉽지만 이름을 잘 알지못하는 작가들부터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뒤러 등 감동을 주는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았다. 고야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크게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선이나 색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데 여전히 왜 고야는 멀게 ..

도망친/스페인 2020.06.01

마드리드 2일

눈이 너무 부셔 시려울 정도로 환한 아침 햇빛이 마드리드, 츄에카를 비췄다. 낯선 도시에서 처음 가보는 동네를 Y와 함께 했다. 츄에카는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힙한 동네인데, LGBT 커뮤니티가 커지면서 인기를 끌게 됐다. 처음에는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격리되거나 쫓겨난 사람들, 이민자, 노숙자, 외국인 등이 살았다고 한다. 게이들도 그 중 하나였는데, 차별받은 그들이 모여 살면서 오히려 동네에 차별이 사라지고 살기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역에서부터 무지개가 반겨줬다. 거리 곳곳에도 무지개 깃발이 펄럭였고 카페, 가게들은 그들을 환영하고 할인도 해줬다. 츄에카는 원래 페데리코 츄에카라는 스페인의 작곡가 이름에서 따온 지명인데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진보적인 츄에카지만 ..

도망친/스페인 2020.05.14

마드리드 1일

우리가 지켜왔던 아름다운 감정이 흘러가는 시간을 쫓아 점점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는데, 영혼이 떠나고 껍질만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미래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는데. 무엇이 나를 감싸고 있었을까. 창 너머로 당장 뭐라도 쏟아질 것 같이 어두운 베를린 하늘을 뒤로하고 주황 빛이 가득한 마드리드에 내렸다. 공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예약한 숙소로 무사히 도착해 간단하게 짐을 풀었다. 마드리드는 베를린보다 따뜻해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카메라를 챙겨 나왔다. 독일이라면 어둑해졌을 시간인데 서쪽은 확실히 해가 더 길었다. 노을이 물들이는 색이 황홀하면서 슬펐다. 해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명암의 대비도 뚜렷해졌다. 예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보이는 대로 이끌리는 대로 걸었다...

도망친/스페인 2020.05.08

바르셀로나, 시체스

(늦은 여행기)친구의 권유로 친척동생과 바르셀로나 근처에 있는 시체스라는 작은 마을에 다녀왔다. 같이 가자고 할 때는 멀어서 관심 없다더니 이녀석 심심했는지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쫓아왔다.시원한 바다가 있는 시체스, 오래된 도시가 아름다운 시체스.해변가를 따라 호텔, 식당, 바가 쭉 늘어서있고 그 중심에 아름다운 교회가 있었다.예술가들이 모일 수 밖에 없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해변이 많다고 들었는데 2개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특히나 시체스는 누드비치랑 동성애자를 위한 해변이 있다. 누드비치였는지 몰랐는데 종종 벗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살짝 눈치만 챘다.동성애자를 위한 해변이라니 정말 놀랍고 신기하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이곳에는 많이 펼쳐진다. 낯선 경험을 맞닥뜨릴 때, 다들 처음엔 어색하..

도망친/스페인 2017.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