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 256

그라나다 8일

말라가와 그라나다를 두고 오래 고민했다. 말라가는 론다도 갈 수 있고 무엇보다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고 그라나다는 알함브라의 궁전을 볼 수 있다. 결국은 버스로 세 시간가량을 달려서 그라나다에 도착했다. 버스비는 편도 50유로 정도 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본 설산이 멋졌다. 후지산을 본 적은 없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났다. 숙소에 짐을 놓고 나왔다. 그라나다에서는 술을 시키면 타파스를 무료로 제공해서 타파스 투어도 많이 다닌다고 한다. 낮부터 사람들이 타파스에 스프리츠(띤또)를 먹고 있었다. 우리는 커피를 마셨다. 가격이 매우 저렴해서 놀랐다. 궁전은 내일 보기로 하고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사람들 구경도 하고 도시 전망도 봤다. 이슬람 양식이 도시 곳곳에 녹아져 있었다. 아라베스크 장..

도망친/스페인 2021.01.09

세비야 8일

떠나는 날 태양을 보고 싶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안개가 껴서 더 깜깜했다. 연휴인 건지 출근 시간이 늦은 건지 거리가 정말 조용했다. 문 닫은 가게, 보이지 않는 사람, 텅 빈 도시. 그 속에 혼자라고 착각하고 돌아다니는 나. 금새 날이 밝고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잠시 동안은 조용히 산책할 수 있었다. 내 바닥의 끝은 어디일까. 더 아래로, 더 깊이 파고든다. 바닥의 바닥의 바닥의 바닥. 거기서 한번 더 내려가 그 아래 또 바닥.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야 끝이 있을지 도저히 감이 안온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을까. 타인을 갈기갈기 찢을 권리가 내게 있는 건가. 내 행복과 선택이 왜 누군가를 아프게 할까. 죽음으로 모든게 끝날까.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끝..

도망친/스페인 2021.01.08 (1)

Würzburg

프라하 같기도 하이델베르크 같기도 파리 같기도. 처음 왔지만 익숙한 도시였다. 특히 코헴이 많이 생각났다. 도시는 썰렁했다. 인적이 거의 없었고 가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코로나 때문인지 연휴여서인지 알 수 없었다. 뜨문뜨문 해가 떴지만 추위가 가시지는 않았다. 거리를 헤매다가 문을 연 빵집이 있어서 커피와 크루아상으로 아침을 먹었다. 교회 앞 광장에는 비둘기와 바람만 공허하게 날렸다. 여름에 왔다면 와인도 마시고 예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겠지만 겨울도 나름 운치가 있었다. 도시를 조금 더 탐구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시도는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도 파악할 수 없는 생각들과 함께 그냥 이리저리 걷고 걸었다. 오랜만에 걸어서 다리가 아팠다. 오랜만에 사진도 몇 장 찍었다. 하루는 즐..

도망친/독일 2020.12.27

파리 6일

파리 일정을 서두른 이유는 신혼여행을 온 K를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어제저녁 힘든 일정으로 몸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간단하게 저녁만 먹고 헤어졌다. 나도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았다. K를 아무렇지 않게 대하기가 생각보다 어려웠다. 식사와 대화를 하면서 줄곧 D를 관찰했는데 그에 반면 D는 침착했다. D의 마음의 깊이는 얼마만큼 파인 것일까. 친구를 더 괜찮은 곳에서 대접하고 싶었는데 서비스나 음식이 가격에 비해 좋지 않았다. 모든게 속상했다. 아침부터 운동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전에 어떤 책에서 유럽 사람들은 귀족처럼 혹은 조선의 양반들처럼 겉으로 보이기를 좋아해서 운동을 잘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는데 시대가 많이 변했다보다. 아니면 세계화의 영향으로 미국인의 생활 방식이 파리에 침투한 것인가? 마르스 광..

도망친/프랑스 2020.11.17

세비야 7일

창백한 아침 공기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는 여전히 이질적이었다. 이곳에 오래 지낸다면 익숙해지겠지. 내가 오렌지를 떠올릴 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노랗게 빛을 발산하는, 마치 썬키스트나 카프리썬의 광고 같은 그림이었다. 생각해보니 제주도도 귤이나 오렌지는 늦가을에서 겨울에 수확했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파랗게 칠한 페인트를 배경으로 열린 오렌지 나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디어는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요새는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우습게 사시사철 귤이나 오렌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과일을 즐길 수 있으니 어느 배경을 뒤로하건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여느 날과 비슷하게 골목을 걷고 사람들의 시간을 훔쳤다. 사진 찍는 걸 아는..

도망친/스페인 2020.11.16

파리 5일

오늘의 황당 사건: D의 폰을 소매치기 맞았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주머니에서 쓰윽하고 가져갔다. 내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바로 쫓아냈는데 이미 털리고 난 뒤였다. 집에 두고 온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다가 확인해봤는데 없었다... 매우 화가 나고 짜증 날 상황이지만 D는 침착해 보였다. 실제로 침착했다. 아마 더 큰 일들이 D를 괴롭혔기 때문에 폰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새 폰을 살까 알아봤지만 생각보다 비싸다며 그냥 폰 없이 다니기로 했다. 백업을 해두지 않은 사진들을 잃어버려서 D는 굉장히 슬퍼했다. D의 시간을 앗아간 건 그들이 아니라 나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분무기처럼 뿌리는 비를 맞으며 파리를 걸었다.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쉬지 않고 셔터를 계속 눌렀..

도망친/프랑스 2020.11.11 (3)

파리 4일

떠나는 아침에도 안개가 자욱했다. 차갑고 수분기 많은 공기가 날카롭고 매서웠다. 도로는 눈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결정들로 얼어있어서 미끄러웠다. 플릭스버스는 연착으로 늦게 왔다. 파리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버스 운전사는 자욱한 안개를 헤쳐 끝없는 도로를 질주했다. 파리는 해가 저물어 어두워지고 있었다. 파리 플릭스 버스 하차지점에서 숙소까지 거리가 꽤 걸려서 우버를 이용했다. 몇 유로 아끼려고 리옹역까지 걸어간 다음에. 언어에 가둘 수 없는 상황들임에도 짜증내지 않고 함께 필요 없는 고생을 하고 있는 S가 안쓰럽고 미안하고 고마웠다. 퇴근 시간과 겹쳐서인지 길이 꽤 막혔다. 센 강변을 따라 줄지어 있는 파리가, 가로등에 얼핏 비치는 S의 얼굴이 예뻤다. 이 상황이 ..

도망친/프랑스 2020.1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