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스페인

세비야 8일

박찬익 2021. 1. 8. 17:05

떠나는 날 태양을 보고 싶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안개가 껴서 더 깜깜했다. 연휴인 건지 출근 시간이 늦은 건지 거리가 정말 조용했다. 문 닫은 가게, 보이지 않는 사람, 텅 빈 도시. 그 속에 혼자라고 착각하고 돌아다니는 나. 금새 날이 밝고 사람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지만, 잠시 동안은 조용히 산책할 수 있었다. 

내 바닥의 끝은 어디일까. 더 아래로, 더 깊이 파고든다. 바닥의 바닥의 바닥의 바닥. 거기서 한번 더 내려가 그 아래 또 바닥. 얼마나 더 깊이 내려가야 끝이 있을지 도저히 감이 안온다.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아프게 할 수 있을까. 타인을 갈기갈기 찢을 권리가 내게 있는 건가. 내 행복과 선택이 왜 누군가를 아프게 할까. 죽음으로 모든게 끝날까. 살고 싶은 마음과 죽고 싶은 마음이 끝없이 반복된다. 가장 살고 싶은 이 순간이 가장 죽고 싶은 순간이다. 재미없어지는 순간은 정말 당황스럽고도 갑작스럽게 찾아온다. 차갑게 식어버리는 내가 질리도록 무섭다. 그렇지만서도 곧바로 뜨거워지는 내가 싫다. 사랑스럽다. 외부인으로써 이 도시는. 강렬하고 아름다운 해, 빛을 반사하는 예쁜 건물들, 다양한 색, 맛있는 음식, 술, 친근한 사람들. 기회가 된다면,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다면 여러 다양한 도시에서 살고싶다. 

잃버버린 단어, 문장, 글들이 너무나 많지만 새로운 단어들도 생겼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는다. 소멸하고 생성하는 이 무한의 반복에서 빛이 나타날 수 있다면, 그 빛으로 어딘가를 비출 수 있다면. 그것이 죽기 전까지 가능하다면 조금은 편하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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