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독일

Spandauer D. 103 + 619

박찬익 2020. 12. 11. 13:04

가게에서 만드는 음식들에 질려서 몸이 너무 무거운 느낌이 들어서 며칠간 단식을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다. 떡볶이를 먹었고 치킨마요를 먹었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는데도 음식을 입으로 욱여넣는 나는 뭘까 생각했다. 

공중그늘의 비옷을 출퇴근하며 들었다. 보컬의 음색이 차갑고 쓸쓸한 이 도시랑 잘 어울렸다. 보통 자주 듣던 노래를 다시 들으면 그때의 분위기나 감정, 온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슬펐다. 기억하려고 해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모든 잘못은 기억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다. 

더 이상 충격적일 일도 놀라울 일도 새로울 일도 없다. 이미지는 말이 없고 글자는 까맣기만 하고 음악은 울림이 없다. 내게 남은 언어는 뭘까. 숨을 깊게 들이쉬고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입을 막고 가만히 누워 내쉬는 숨 하나하나를 기억하는 일만이 남은 듯하다. 하릴없이 울리는 사이렌 소리도 짙게 내려앉은 안개도 나를 정적으로 몰아세운다. 낮은 온도와 습도가 높은 베를린의 공기는 내 온몸에 스며들어 병적으로 지난 시간을 앞으로의 시간을 잔인하게 휘젓는다. 

나는 스스로에게 내가 좋은지 행복한지 자주 묻는다. 누군가 묻지 않기에 대답할 필요도 없지만 많이를 넘어서 행복하고 나를 사랑한다. 마지못한 고백도 아니고 억지 행복도 아니다. 다만 이 좋음과 죄책감의 괴리가 커서 어려움이 조금 있다. 지금까지 내가 저질러 온 수많은 과오들은 끝나지 않는 소나기처럼 퍼붓는데 그걸 피할 방법이 없다. 이겨낼 방법도 마주할 방법도 없다. 단지 비옷을 입고 비 속 가운데 서있는 일 말고는. 그러다가 세상은 멈추지 않는 비에 잠길테고 키를 찾지 못한 나는 발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잠들듯이 가라 앉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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