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독일

Spandauer Damm 103 + 610

박찬익 2020. 12. 3. 01:17

퇴근하고 걸어오는 길에 공원묘지가 있어서 잠시 쉬었다. 4시까지 밖에 문을 안열여서 아쉬웠다. 가만히 누워서 이미 어두워진, 암청색의 베를린의 하늘을 보다가 시체놀이도 하고 나무랑 대화도 하고 놀았다. 묘지에 누워보는 건 처음이었다. 고요함과 적막함 평안함과 익숙함이 잘 전해졌다. 땅의 한기와 시린 바람이 어둠으로 덩어리져 내 몸을 감쌌다. 롱패딩을 입은 채 여러 감정들에 돌돌 말린 기분이었다. 결박됐지만 답답하지 않았다. 죽음이 가까옴을 느낄 수 있었다. 땅 속인지 물 속인지 하늘 위인지 알 수 없는 깊은 어디쯤에서 묵직한 침묵만 잔잔히 흔들렸다. 파도를 보듯이 구름을 보듯이 먼 저편의 고요함을 갈망하고 있었다. 눈을 뜨면 나무들이 여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서로 싸우는 벌레들도 있었고 섹스를 하는 사람, 팅커벨, 유령, 온갖 것들이 시끄럽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곳 저곳에서 폭탄이 터지고 거미는 나를 계속 따라왔다. 이제 점점 더 미쳐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를 나왔다. 새로 심긴 가로수들이 보였다. 다른 나무에 비해 정말 가냘프고 가지도 잎도 얼마 없었다. 한 아름만큼 커다란 나무가 되고 싶은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꽤 많은 겨울을 보내야 다른 나무들처럼 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불쌍했다. 그 나무를 나는 보지는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별로 보고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갈망하지 않았다. 앰뷸런스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저건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아온 > 독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Spandauer Damm 103 + 616  (0) 2020.12.08
미니잡 27주차  (3) 2020.12.05
Spandauer Damm 103 + 610  (0) 2020.12.03
Spandauer Damm 103 + 608  (0) 2020.11.30
Spandauer Damm 103 + 602  (2) 2020.11.24
미니잡 26주차  (0) 2020.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