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독일

Spandauer Damm + 595

박찬익 2020. 11. 18. 18:34

헤이즐의 수업이 캔슬돼서 퇴근 후 어딘가를 가기로 했다. 황량하게 탁 트인 곳을 이곳저곳 떠올리다가 반제를 가기로 했다. 후보군에는 올림공원이랑 토이펠스베억이었다. 물이 그리웠다. 사진을 찍고 싶어서 사진기를 챙겨달라고 했다. 에스반 역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동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온도도 쌀쌀했는데 이미 해까지 져버려서 오래 있다 오지는 못하겠다 생각했다. 가면서 역시 제발트 글을 읽었다. 섬세한 표현들과 단어 하나하나가 온몸을 감싸고 간지럽히다가 찌르다가 때리기도 하고 긁기도 했다. 베를린을 떠올리는 장면을 읽었는데 마침 딱 적절하다는 생각을 했다. 머릿속에 이미지들이 글을 따라 모였다가 흩어졌다 만들었다 부쉈다를 반복했다.

해변의 모래는 밟지 못했지만 오랜만에 물을 봐서 너무 좋았다. 탁 트인 시야에 안개비가 조화롭게 섞여 잿빛과 푸른빛을 발산하고 있었는데 대기질의 무거운 수분 때문인지 빛이 퍼지질 못하고 오히려 가운데로 수렴했다. 새벽인지 밤인지 낮인지 저녁인지 시간을 구분할 수 없는 어느 때였다. 1975의 I always wanna die를 들으며 젖은 벤치에 앉아 누가 던져주는 먹이를 먹고 있는 오리들을 구경했다. 조금 늦게 일어난 것 같은 오리가 뒤늦게 멀리서 열심히 헤엄쳐 합류했는데 이미 잔치는 끝난 뒤였다. 역시 게으르면 안 되는 것인가.

조성된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서 나무 사진들을 찍었다. 하늘과 물의 경계가 사라진 곳에서 나무는 어떤 선처럼 서있기도 누워있기도 했다. 이 세상을 깨부수려는 번개 같기도 하고 하늘에 뿌리내린 뿌리 같기도 했다. 어디에 있는지 분간할 수 없는 나를 어떻게 하려는 것 같았다. 자꾸 갈라놓고 구분 지었다. 나를 마구 덮치기도 했고 감싸기도 했다. 솟아있으면서도 쏟아졌다. 겨울의 나무들은 힘이 넘쳐서 발산하는 건지 기력이 쇠해 잎들을 떨구는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빗방울들이 모여 떨어졌는데 나무가 우는 것 같았다. 

비가 조금 더 세차게 내렸다. 어두워서 모르고 있다가 가로등에 비치는 비를 보고 알았다. 전부터 가로등들은 각자 누군가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많은 눈들이 뭔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아래로 가서 하나씩 나도 눈을 맞췄다. 무서웠다. 마치 나는 물속의 작은 생물이었는데 그들 눈에 내가 보였다. 그 사실을 내가 알아차렸다. 내가 눈치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날 잡으려고 문어 비슷한 빨판이 달린 포식자를 집어넣었다. 다행히 도망쳤지만 눈치채지 못했더라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 눈치채지 못한 어떤 친구는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스스로 간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에 달라붙어 꽉 묶여 있는 느낌이 좋다고 했다. 내가 있는 세상은 너무 좁으면서도 끝없이 광활했다. 물 밖으로 나가면 또 다른 물이 있고 그 물을 올라가면 또 새로운 물이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다음에도 그다음의 다음에도 물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녁 시간이 가까워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많은 점과 선과 면이 교차하는 반제 역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 사이를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쳤고 앞으로도 지나칠 거라는 사실이 우스웠다. 왜 우스웠을까? 중요하지 않으니까 떠올라도 떠오르지 않아도 좋다.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하얗게 빛나는 전등 아래서 플랫폼을 향해 끝없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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