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스페인

세비야 7일

박찬익 2020. 11. 16. 23:52

창백한 아침 공기에 오렌지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는 여전히 이질적이었다. 이곳에 오래 지낸다면 익숙해지겠지. 내가 오렌지를 떠올릴 때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 아래 노랗게 빛을 발산하는, 마치 썬키스트나 카프리썬의 광고 같은 그림이었다. 생각해보니 제주도도 귤이나 오렌지는 늦가을에서 겨울에 수확했으니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파랗게 칠한 페인트를 배경으로 열린 오렌지 나무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미디어는 이미지를 심어 놓았다. 요새는 제철 과일이라는 말이 우습게 사시사철 귤이나 오렌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과일을 즐길 수 있으니 어느 배경을 뒤로하건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여느 날과 비슷하게 골목을 걷고 사람들의 시간을 훔쳤다. 사진 찍는 걸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스릴과 당당함, 그 자체가 유희였지만 그거로는 안됐다. 텅 빈 느낌이었다. 뭘 해도 채워지지 않았다. 스쳐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를 찾고 싶었다. 나를 찍고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해 질 녘에는 노을을 쫓아 보랏빛 하늘을 쫓아 서쪽으로 끝없이 달렸다. 모든 걸 뒤로하고 앞으로 계속 갔다. 벽을 넘으면 또 벽이 있었고 그걸 넘으면 다른 벽이 빛을 가렸다. 그러다 해는 사라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는 시간들이 계속됐다. 생각 없이 그냥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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