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독일

spandauer damm 103 + 589

박찬익 2020. 11. 12. 23:51

몇 개월간 사진을 찍지 않다가 오랜만에 사진기를 들었다. 뭔가를 찍고 싶은 게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무슨 사진을 찍는지, 어떤 생각으로 사진을 찍는지 궁금해서 서점에 들러 요새 나오는 출판물을 보다가 나왔다. 별다른 걸 찾지는 못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골목을 걸었다. 그러다 교회에서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나무들이 보였다. 이미 겨울이 찾아온 베를린의 나무들은 가지만 앙상했다. 깨진 거울 같기도 하고 폭발하는 혈관 같았다. 피가 거꾸로 솟고 폭죽처럼 터졌다. 콘크리트 벽의 드러난 철사 구조물은 코브라 같기도 했고 벽 틈새에서 자라는 가지는 새의 다리 같기도 했다. 모두들 나를 잡아먹으려고 각을 재는 것 같았다. 지하철의 계단들은 거대한 강판 같아서 내 몸이 치즈처럼 사방팔방으로 갈려 나가는 기분이었다. 

작은 균열이 생기고 그 틈을 비집고 오만 것들이 머리를 뒤집어 흔든다. 이리저리 가지를 뻗어 나간다. 어느새 내 전신을 감싸고 나를 조종한다. 나는 기꺼이 그들에게 나를 양보한다. 부디 조용히 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전에는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이리저리 헤맸다. 내게 보이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특히나 감미로운 색들에 환한 미소는 금상첨화였다. 얼룩진 지난 날들도 화려한 채색으로 덮을 수 있었다. 화해로 용서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나의 무의식 깊이 스며 있는 미적, 윤리적 가치들은 모두 신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신이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것들이 나의 가치들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냈다. 이것들이 나 자신으로 살아가는  방해했다. 내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억압하고 만들어 보여주어야 하는 포즈들을 억지로 요구했다. 더이상 그러지 않기로 하고 나를 파괴하기로 했다. 그러자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무너졌다. 나를 제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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