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프랑스

파리 5일

박찬익 2020. 11. 11. 14:23

오늘의 황당 사건: D의 폰을 소매치기 맞았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주머니에서 쓰윽하고 가져갔다. 내가 이상한 낌새를 채고 바로 쫓아냈는데 이미 털리고 난 뒤였다. 집에 두고 온 거라고 생각하고 돌아다니다가 확인해봤는데 없었다...

매우 화가 나고 짜증 날 상황이지만 D는 침착해 보였다. 실제로 침착했다. 아마 더 큰 일들이 D를 괴롭혔기 때문에 폰을 신경 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새 폰을 살까 알아봤지만 생각보다 비싸다며 그냥 폰 없이 다니기로 했다. 백업을 해두지 않은 사진들을 잃어버려서 D는 굉장히 슬퍼했다. D의 시간을 앗아간 건 그들이 아니라 나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분무기처럼 뿌리는 비를 맞으며 파리를 걸었다. 사진을 정말 많이 찍었다. 쉬지 않고 셔터를 계속 눌렀고 알 수 없는 사람들, 간판, 자동차, 보이는 모든 것들을 프레임에 가뒀다. 그럴수록 자유 해지는 기분이었다. 깊은 곳에서 뭔가가 계속 끓어 올랐다. 느린 셔터 속도로 이방인들을, 낯선 도시를 흐리게 찍을 때 프레임 안의 세상이 다른 누구도 앗아가거나 침범하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이 됐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회색의 잔잔함, 깊이 스며있는 정적, 흐려지는 모든 세상. 점점 더 명확하고 또렷이 재현해내는 사진이 아니라 초점 잃은 불명료함이 나를 상상하게 했다. 어딘가로 계속 흐르는 내가 그 시간들을 붙잡은 결과는 흐릿한 세상, 사람들이었다. 그럴 수록 나에게 더 포커스를 맞출 수 있었다. 이 매커니즘을 통해 나라는 자신을 포기하도록 하는 현실과 현실을 포기하도록 하는 저항의 욕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채 갈등하다가 방향을 찾은 느낌이었다. 또렷한 현실을 밀어내고 나의 욕망을 인정함으로써 현실을 보고 그 고통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기로 했다. 그게 설령 죽음으로 떨어지는 방향이라고 해도 말이다. 

아래 사진들은 글과는 상관없는 하루의 기록.
맛있는 커피를 찾다가 집 근처의 카페를 가고 루브르 근처에 추억이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당시 생사를 오가는 어떤 긴박한 현실에 매달려 있었는데,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래서 그런지 이 때 열린 추억들의 맛과 향이 더욱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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