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스페인

마드리드 3일

박찬익 2020. 6. 1. 12:11

유독 추위를 많이 느끼는 나이지만 마드리드도 12월은 쌀쌀했다. 일요일 아침 거리는 휑했다. 그래도 S와 함께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침으로 따뜻한 커피에 빵을 사서 미술관으로 갔다.   

프라도 무료입장을 포기하고 아침 일찍부터 미술관 관람을 했다. 꽤 길게 줄을 서서 티켓팅을 하고 관람을 했는데 역시나 웅장한 사이즈, 방대한 작품들에 괜히 3대 미술관이 아니구나 싶었다. 세계 3대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그만큼 자부심이 있다 정도로 받아들이고 관람을 했다. 사진촬영이 불가해서 아쉽지만 이름을 잘 알지못하는 작가들부터 벨라스케스, 티치아노, 뒤러 등 감동을 주는 좋은 작품들이 정말 많았다. 고야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크게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선이나 색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데 여전히 왜 고야는 멀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나와 너무 닮아서 그랬을지도. 내게 스페인 미술은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독일, 네덜란드보다 익숙하지 않았는데 다른 국가들과 달리 그들만의 화풍을 가지기 위한 노력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뒤로 위대한 예술가들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했다. 

세고비야로 가는 버스시간이 중간에 떠서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빈티지 가게를 발견했다. S와 나는 신나서 쇼핑을 했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버스를 놓칠 뻔 했다. S를 먼저 보내고 나는 매우 저렴한 가격에 마음에 드는 옷을 겟하고 엄청 달려서 1분 차이로 버스에 탈 수 있었다. 땀을 닦으며 조금 쉬기도 졸기도 하니 세고비야에 도착했다. 

전날 수도교 하나보고 세고비야에 가기로 했다. 우리는 로마의 흔적을 좋아했다. 서구 문명의 뿌리이자 제국의 화려했던 모습과 황폐해진 터까지 영원할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게 만든 기술의 정교함과 로마인들의 지혜는 어디에서 왔을까를 상상하며 우리도 오랜 시간을 견디길 원했다.

공주 이야기들의 모티프가 된 성도 아름다웠고 교회도 아름다웠다. 세고비야의 타는 노을도 절로 감탄이 나왔고 시간이 변할 수록 달라지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수도교는 황홀했다. 무엇보다 황혼의 그 모습은 가만히 서서 볼 수 없었다. 잔디밭에 한참을 누워있었다. 초승달은 더 하얗게 빛났고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은 그런 달을 더 돋보이게 했다. 낭만적이었다. 이 모든 시간이 우리 관계가. 그렇지만 아름다우면 아름다울수록 더 슬퍼졌다. 낭만은 찰라였고 밤은 깊어져갔다.

성에서 교회로, 수도교로 내려오면서 가게들을 돌면서 쇼핑을 했다. S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자들을 샀다. 100년 전 경성에서 썼을 법한 모자들이었다. 저녁거리로 피자를 샀다. 수도교 계단에 앉아 먹는데 날이 추워서 생각보다 빨리 식었다. 식은 피자도 맛있었지만 뜨거움에서 차갑게 식은건 조금 슬펐다. 차가운 돌 위에 앉아 S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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