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스페인

마드리드 1일

박찬익 2020. 5. 8. 23:26

우리가 지켜왔던 아름다운 감정이 흘러가는 시간을 쫓아 점점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는데, 영혼이 떠나고 껍질만 남아서 살아가야 하는 미래를 도무지 견딜 수 없었는데. 무엇이 나를 감싸고 있었을까. 창 너머로 당장 뭐라도 쏟아질 것 같이 어두운 베를린 하늘을 뒤로하고 주황 빛이 가득한 마드리드에 내렸다.  

공항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예약한 숙소로 무사히 도착해 간단하게 짐을 풀었다. 마드리드는 베를린보다 따뜻해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카메라를 챙겨 나왔다. 독일이라면 어둑해졌을 시간인데 서쪽은 확실히 해가 더 길었다. 노을이 물들이는 색이 황홀하면서 슬펐다. 해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명암의 대비도 뚜렷해졌다. 예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보이는 대로 이끌리는 대로 걸었다. 마드리드 왕궁이 근처에 있었지만 바로 찾기는 힘들었다. 정원을 통과하려고 했는데 폴리스 라인으로 막혀있었다. 길을 찾아 조금 헤매다가 빙 돌아 왕궁으로 갔다. 하늘 빛이 어느새 핑크에서 보라로 변하고 있었다. 참 예뻤다. 하늘 빛이 예쁜 곳, 사람이 많은 곳을 따라 걸었다. 왕궁 앞 광장에서 수학여행 온 학생들, 여행 온 사람들, 마드리드 시민들이 마지막 노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버스커들은 분위기를 더 뜨겁게 달궜다. 마드리드에 대한 정보는 축구 팀과 스페인의 수도, 큰 미술관이 있다 정도였다. 도시의 문화, 역사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분위기대로 좋았다. 이유를 알기 싫은 이상한 기분에 계속 좋은 것만 집어 넣었다. 너무 달콤했다. 그만큼 슬픔이 컸지만 슬픈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큰 곳 위주로 걷다보니 마드리드 중심지를 통으로 걸었다. 왕궁에서 솔 광장쪽으로 걸었는데 가는 길에 눈요기를 할만한 곳들이 굉장히 많았다. 산미구엘 시장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음식을 사먹고 싶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마요르 광장 역시 사람이 많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크게 열려있었는데 사람이 진짜 많았다. 마드리드는 어딜가나 사람이 미어터졌다. 그 늦은 시간에 솔 광장에도 정말 많았다. 오렌지에서 심카드를 사고 광장을 황급히 벗어났다.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냥 그 자리를 피해야한다.

광장을 벗어나 그랑비아에 타파스 가게로 갔다. 사람들이 여기도 가득해서 처음엔 서서 먹다가 자리가 나서 앉았다. 문어, 오징어, 연어, 꼬지 몇 개랑 상그리아 큰거를 시켰다. D는 술을 안마셔서 혼자서 거의 다 마셔야했다. 달고 맛있었다. 분위기에 술에 대화에 취해 즐거웠다. 도저히 회복할 가망이 없을 만큼 상처를 입은 D앞에서 즐거워하면 안됐지만 스페인에서 함께하는게 즐거웠다. D역시 이 시간을 즐기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했다. 영원히 가슴속에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것이 안쓰러워보였지만, 그래서 더욱 최선을 다해 즐거워하고 그 시간을 만끽하려고 했다. 그때는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불행히도 D에게는 이 모든 상황이 죽음 이상으로 고통스럽게 하는 상처 그 자체였다. 우리 모두에게 그 순간 살아있는 것이 고통이었다. D는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했다. 

늦은 시간에도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클럽 입구는 북적였다. 다들 2019년의 마지막 금요일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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