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친/한국

제주여행 4일차

박찬익 2018. 1. 20. 16:02

​아, 숙취.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몸이 힘들었나보다.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여름용이라 얇지만 빛은 확실하게 가려주는 커튼을 걷어 젖히고 블라인드도 올렸다. 깨끗하고 맑은 아침은 아니었지만 환한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화장실에 가서 숙취를 비워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거실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등이 아니라 햇살 아래서 읽는 책이 얼마만이었을까? 여기에는 차분하게 쉬면서 내면의 공간을 채울 경치와 시설이 잘 준비되어 있었다. 한숨 돌릴 수 있는 장소,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가득해지는 그런 곳. 서울에서는 한강이 그랬는데 요새는 먼지로 가득해서 잘 나가지도 않았다. 


서울살이는(먼지를 포함해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 미래를 살아갈 젊은 친구들이 바삐 걷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차분한 즐거움이 가득한 도시로 서울을 만들어가면 좋겠다. 역시 나부터 돈이 우선되는 삶을 살지 않아야지.


확실히 혼자있는 시간이 부족한 여행은 내 타입이 아니다. 물론 즐겁다. 함께 어울려 곳곳을 다니며 아름다운 햇살, 짙으면서도 투명한 제주의 바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한라산을 보고 나에게도 미각이 있었음을 떠올리게 하는 맛있는 음식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시간이 좋다. 하지만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 언뜻 풍기는 봄내음을 만끽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이런 것들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아침으로 친구가 김밥을 싸줬다. 임산부의 몸으로 재료를 준비해서 야무지게 김밥을 마는 손이 아름다웠다. 항상 손님을 대접하는 따뜻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본받고 싶은 구석이 참 많은 부부이자 한 사람이다.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쉬다가 집 근처 올레 길을 걸었다. 원당봉으로 시작해서 조천까지 이어지는 길이었다. 이 길은 내가 전에 제주 여행할 때 걸었던 길이기도 했다. 세월이 참 빠름을 느끼며, 또 자본의 유입을 느끼며 훈훈하면서도 씁쓸한 길을 걸었다.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컸나보다. 


많이 걷고, 오래 보고, 푹 쉬었다.


푸르른 제주가 점점 오렌지 빛으로, 하늘이 분홍에서 붉은 색으로 물드는 시간속에 빠지며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오늘의 노을을 보내고 저녁을 맞이한다. 이런 풍요로움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맛인가보다. 모두에게 고맙다. 


내 감정과 생각을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이 상당히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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